- 화석연료와 전기에너지의 공존 시작돼
- 제조업 기반의 소프트웨어 기업으로 변신 경쟁
“에너지 전환의 서막이 올랐다.” 지난 9월 독일 프랑크푸르트모터쇼(IAA)에서 만난 국내 완성차 업계 관계자의 말이다. 모든 제조사가 앞다퉈 전기차를 주력 무대에 올렸을 만큼 수송 에너지를 전기로 바꾸려는 움직임이 뚜렷했기 때문이다. 배출가스를 지금보다 더욱 줄이라는 유럽연합의 정책에 대응할 방법이 전기밖에 없다면 차라리 대중화를 앞당겨 수익을 확보하자는 목표가 어김없이 제시된 탓이다. 그래서 2017 프랑크푸르트모터쇼를 한마디로 정의하라면 ‘수소 에너지의 변곡점’으로 표현할 수 있다.
2017 프랑크푸르트 모터쇼 전경
일반적으로 수학에서 변곡점이란 위아래 오목과 볼록인 선이 반대되는 점을 말한다. 변곡점을 중심으로 앞뒤가 일부 겹치다 시간이 흐를수록 상승세가 커지는 경우를 말한다. 내연기관 시장의 판도를 뒤바꾸는 '게임 체인저‘(Game Changer)가 전기차라면 이번 모터쇼는 각 사 전기차가 앞다퉈 경쟁하며 차츰 규모의 경제에 도달할 가능성이 입증된 자리였다.
미니 전기 콘셉트
명분은 물론 폭스바겐에서 비롯된 디젤 게이트다. 그리고 사태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메르세데스-벤츠도 디젤 엔진 조작 의심으로 조사하고 있으며, PSA와 FCA 등도 예외 없이 디젤 곤경에 처했다. 그러자 주요 제조사들이 하나같이 전기차를 앞세웠고, 공통으로 2025년이면 전기차가 전체 판매의 20%에 달할 것이란 전망도 쏟아냈다. I.D. 전기차를 내놓은 폭스바겐과 EQA 콘셉트카를 중앙에 배치한 메르세데스 벤츠, 'i' 브랜드에 다양한 전기차를 넣겠다는 BMW 등은 물론 현대차 아이오닉, 미니(MINI) 전기 콘셉트, 스마트 포투 일렉트릭 등 수 많은 완성차 기업들이 전기를 내연기관의 대안으로 삼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표현했다.
스마트 포투 자율주행 콘셉트
하지만 전기차를 앞세웠다고 기존 내연기관을 줄인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전기차 개발에 투자할 비용은 여전히 내연기관이 확보해주고 있어서다. 폭스바겐이 I.D. 콘셉트 외에 SUV 선호 추세에 맞춰 내놓은 티록, BMW X7 i퍼포먼스 콘셉트, 아우디 4세대 A8, 기아차 프로씨드 콘셉트, 벤틀리 3세대 컨티넨탈 GT, 오펠 그랜드X 등에는 여전히 내연기관이 탑재돼 있다. 현장에서 만난 폭스바겐그룹 울리히 아이히호른(Ulrich Eichhorn) R&D 총괄은 "전기차를 내세웠다고 모든 차를 전기차로 전환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2030년까지 폭스바겐그룹 산하 모든 브랜드가 내연기관에 여전히 집중하되 일부 제품은 전기차만 생산한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BMW X7 i퍼포먼스 콘셉트
여러 제조사가 전기 동력을 활용하려는 또 하나의 이유는 이동의 자유로움 때문이다. 딕 아놀드(Dirk Arnold) BMW 'i' 브랜드 제품 총괄은 "자동차는 앞으로도 이동(Mobility) 수단이지만 이동 거리와 용도에 따라 다양한 모빌리티가 나올 수밖에 없고, 이때 손쉽게 활용 가능한 동력이 바로 일렉트릭 엔진, 즉 전기 동력"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이동의 목적'이며, BMW는 소비자가 필요로 하는 '목적'을 어떻게 하면 쉽게 해결할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고 강조한다.
BMW i 비전 다이나믹스 콘셉트
또 다른 흐름은 앞으로 치열한 자율주행 경쟁을 예고했다는 점이다. 메르세데스-벤츠가 자신들의 전시장 외벽에 자율주행을 의미하는 'Autonomous'를 선명하게 표현한 게 대표적이다. 아우디 또한 사람의 운전이 필요 없는 일레인 자율주행 콘셉트를 내놨고, 르노는 자율주행 레벨 4에 해당하는 '심비오즈’(SYMBIOZ)를 앞세워 사람이 직접 운전하지 않아도 되는 시대를 예고했다. 르노의 토팡 로랑(Taupin Laurent) 자율주행기술 총괄은 "현재는 사람과 자동차가 필요할 때 운전을 교차하는 3단계 수준이지만 르노는 운전자 조향이 없어도 되는 4단계를 추구한다"며 "2020년부터 고속도로에서 실차 시험을 진행한 후 난이도를 점차 높여 모든 도로에서 자율주행이 가능한 수준에 도달하는 게 목표"라고 설명했다. 이후 법규가 풀린다는 가정하에 2023년부터 판매에 나설 수 있을 것으로 예측했다.
르노 콘셉트카 심비오즈
자율주행이 추구되면서 당연히 커넥티비티(Connectivity), 즉 연결성도 중요 항목임은 틀림없다. 폭스바겐의 자율주행 컨셉트 세드릭(Sedric)은 전기 동력을 쓰되 자율주행이 동시에 추구된 제품이다. 2020년까지 상용화가 목표로, 요한 융비르트(Johann Jungwirth) 폭스바겐그룹 디지털 전략 총괄은 "세드릭은 언제든 탑승 인원 확장이 가능한 공간 중심의 이동 수단"이라며 "자체 설립한 모빌리티 서비스 기업인 모이아(MOIA)에 제공되는데, 많은 정보를 외부로부터 받아야 하는 만큼 연결성은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폭스바겐그룹은 그간 핵심 사업인 자동차 제조에서 벗어나 통합 이동수단 서비스 제공업체로 체질을 바꿀 것이란 점도 분명히 했다. 이른바 제조물을 판매하기도 하지만 이를 공유사업에 활용, 모든 이동 서비스를 통합 제공하는 방향의 미래 전략을 최우선으로 삼겠다는 의미다.
폭스바겐 티록(T-ROC)
물론 유럽 완성차회사들이 전기 동력을 활용한 자율주행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만큼 협력 업체의 기술 완성도가 충분히 뒷받침됐기 때문이다. 바스프가 전기차의 효율 향상을 위해 경량화 소재를 제공하고, 세계 최대 부품기업 보쉬는 전기 동력 기반의 자율주행 기술을 제공, 해마다 성장하는 중이다. 보쉬그룹 폴크마 덴너 회장(Dr. Volkmar Denner)이 "미래의 모빌리티에 있어 우리는 이미 좋은 위치에 있다"고 말한 것도 자율주행 솔루션을 이미 확보하고 있어서다. 특히 그는 "사고, 스트레스, 배기가스 없는 모빌리티는 자동화(automation), 전기화(electrification), 커넥티비티(connectivity)를 통해 실현될 것"이라며 "지금은 모빌리티의 새로운 개념이 필요한 때"라고 강조했다.
아우디 4세대 A8
이런 이유로 메르세데스 벤츠는 자율주행차를 ‘로봇카’(Robotcar)로 부르면서 제조 기반의 소프트웨어 기업이 될 것을 선언했다. 자율주행에 필요한 하드웨어는 부품업체로부터 사 오지만 이들을 통합, 제어하는 소프트웨어를 직접 개발해야 자율주행차의 주도권을 놓치지 않을 수 있어서다. 사람에 비유하면 '똑똑한 뇌'’를 만들겠다는 것이며, 최근 미래 산업 트렌드를 반영하면 인공지능(AI) 제작에 나선다는 뜻이다. 벤츠의 자율주행 개발을 이끄는 헤프너 박사는 "벤츠 제품에 적용할 인공지능은 다른 회사는 물론 자동차 이외 산업에도 제공할 수 있고, 2020년 초에 자율주행차를 만들어 판매하겠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물론 여기에 학습 기능이 포함되는 것은 당연하다. 150년 제조 기반에 소프트웨어를 접목해 제조와 IT 통합 기업으로 바꾼다는 얘기다. 첫 상용화 제품은 정해지지 않았지만, 스마트 EQ 콘셉트처럼 스티어링과 페달이 없다.
메르세데스 벤츠 EQA 콘셉트
이렇듯 2017 프랑크푸르트모터쇼는 전기 동력의 일상화와 자율주행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변곡점이 되기에 충분했다. 대체로 2030년이면 소비자들이 내연기관과 전기차 가운데 하나를 주저 없이 선택하는 시점으로 내다봤고, 자율주행은 그 이전에 일반 도로 주행이 가능한 상용화 시대가 올 것으로 전망했다. 그리고 이런 예측 하에 유럽 내 완성차기업들의 발걸음이 조금씩 빨라진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자리였다. 빠르게 지능화되는 시대에도 자동차 주도권을 놓치지 않기 위해 말이다.
재규어 E-페이스
흔히 말하는 이동에 관한 통합 서비스를 제공할 곳은 이동 수단을 만드는 자동차회사가 가장 잘 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오랜 시간 제조업으로 인식됐던 자동차산업이 이제는 제조를 넘어 통합 이동 서비스 기업으로 진화하는 중이다. 현장에서 만난 국내 완성차 업계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내놓은 말이 기억에 오래 남는다. “기술은 늦지 않았지만, 생각은 한국이 많이 뒤져있다”는 것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