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프라이드. 내 기억의 길 위에서 달리는 작은 자동차. 스물, 그 봄이었다. 대학생이 되던 해, 집을 떠나던 그날, 집 앞에서 양손에 짐을 들고 너를 기다렸다. 청소년기를 보내던 고향을 떠나 내가 서울로 가는 날이었다. 너는 겨울에 운전면허를 취득했고 그렇게 너는 항상 뭐든지 나보다 빨랐다. 감당할 수 없이 큰 이별을 하는 것도 아닌데 다시 볼 수 있는데, 나는 나의 ‘이동’이 아주 딴 데로 가는 마지막인 것처럼 단절에 대한 이상한 두려움을 겪으며 서 있었다. 나는 그때 ‘떠난다는 것’을 처음으로 느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익숙한 것, 익숙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내가 움직여서 혼자 가는 것. 그 생활의 변화에 잔뜩 겁을 먹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삶의 장면 전환이었고 그 장면이 앞으로 어떤 장면으로 이어지며 나를 어디로 데리고 갈지, 그날 거기에 선 채로 스무 살의 나는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었으므로.
오고 있는 네가 좋았다. 너를 기다리는 내가 좋았다. 오랜 친구인 네가 ‘초보운전’ 스티커를 붙인 첫차를 주춤주춤 끌고서 나를 데리러 오고 있다는 사실이 그냥 좋았다. 좀 안심이 되었다. 스무 살의 너는 나를 향해 가고 있는 동안에 무슨 생각을 하면서 빨간 신호등 앞에 서 있었으며 어떤 마음으로 다시 출발했을까. 몇 개의 정지 신호를 지키며 좌회전을 하고 우회전을 하면서 내게로 오고 있었을까. 너의 집과 나의 집은 끝에서 끝이었는데 먼 거리였는데 너는 나를 향해 가는 동안에 어떤 장면 속으로 달리고 있었을까. 서툰 운전으로 당황스러운 곤란을 겪지는 않았을까.
길의 저 끝에서 빨간 프라이드는 모습을 드러내며 점점 내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거의 삼십 년이 다 되어가는 그날의 그 순간은 아직도 선명하다. 차에서 내리면서 엷게 웃던 너. “오래 기다렸지”. 너의 목소리까지도. 짐을 뒷자리에 싣고 네 옆자리에 앉았다. 우리는 다시 출발했다. 목적지는 고속버스터미널. 너의 차가 천천히 도로 위로 달리기 시작하자 서울이라는 낯선 곳으로 나는 혼자 가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강해지고 있었다. 달릴수록 그랬다. 가는 동안에 우리가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그건 기억나지 않는다. 음소거 상태인 듯 내 기억에서 소리는 사라지고 그날의 감정만이 고스란히 반복 재생된다. 리듬은 불규칙한 심장박동. 초조한 색으로 물드는 사방. 터미널이 자꾸 더 멀어지기를 바라는 마음. 이 모든 것들이 그 장면과 함께 현재에도 극대화되는 날은 내가 더 혼자인 듯 외로운 날이며 네가 생각나는 날이다. 오랫동안 함께 살던 개도 가고 누구와도 대화할 수 없는 날이며 독백도 의미 없다는 생각으로 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을 닫고 지내는 침묵의 날이다. 모서리에 무릎을 부딪치거나 발등에 물건을 떨어뜨릴 때 강렬한 통증으로 흘러나오는 소리. 그것마저도 낯선 날이다. 그러므로 네가 유난히 보고 싶은 날이다.
추억 속의 빨간 프라이드 (사진 출처: 구글 이미지)
향해 가는 동안 그 과정에 너와 함께 있었던 온기는 내게 남아있다. 복잡한 마음으로, 흐르는 시간에게 어쩔 수 없이 나를 맡긴 그때, 옆자리에 네가 있었다. 나는 너의, 너는 나의 옆이었다. 그리고 여전히 지속적으로 멀리에 있어도 변함없이 너는 옆에 있다. 실제의 거리를 심정의 거리가 넘어서고 앞지른다. 좁힌다. 나는 너의 옆자리에 있다.
목적지. 향하여 가야만 다다르게 되는 곳. 여행을 할 때 우리는 목적지를 향해 달린다. 계획하고 정해둔 그곳을 위해 출발한다. 가장 빨리 갈 수 있는 노선을 찾고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가로지르기도 한다. 가는 과정을 즐기는 것보다 도착하는 것 자체가 더 우선인 순간이 있고, 끝이 없기를 바라며 방랑하고 싶은 순간이 더 중요할 때가 있다. 그러나 어떤 순간이든 우리는 이동하고 향해 달린다. 우리는 함께 가고 있는 것이다. 목적지만을 목적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에 충실하고 ‘함께’ 가는 사람에게 충분하게 전하며 가는 과정. 나는 너와 달리던 그날의 길을 떠올릴 때마다 그 생각의 끝에서, 놓쳐버린 시간과 놓아버린 사람을 떠올린다. 그것은 두 번 다시는 없을 시간이었다는 것을 그때는 왜 알지 못했을까. 이것은 나를 가르치고 변화시키려는 시간의 목적인가. 항상 뒤늦게 깨닫게 되는 것은 ‘반성’이 정해놓은 철저한 규칙인가. 가는 동안에 그 ‘동안’이 영원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그때그때 알아차리고 실감하며 후회가 남지 않을 포즈로 임할 수 있었더라면. 그렇게 지나왔더라면.
지금도 존재는 향한다. 태어난 것은 간다. 삶의 목적이 죽음은 아니지만 다 알고 있는 결국의 종착지. 나는 그걸 저 멀리에 두고 모른 체하며 사는지도 모른다. 오늘도 가고 있다. 조금씩 그쪽으로. 하루하루가 간다.
빨간 프라이드. 내가 그곳을 떠나던 날, 나를 태우러 오던 그날의 작은 자동차. 나의 친구 은정이. 그것은 스무 살 은정이의 자동차. 이후로도 나는 수없이 너의 옆자리에 앉아 어딘가를 함께 향했다. 너의 자동차는 여러 번 색을 달리하며 차종이 바뀌었고 너에게는 아이 둘이 태어나 잘 자라고 있고, 자주 만나지 못해도 우리는 지금도 서로의 옆이다. 함께 가고 있다. 가고 있는 동안에 안부를 묻고 시시콜콜 삶의 문제들을 풀어놓으며 최선의 속도로 서로를 향할 것이다. 삼십 년 동안 그렇게 왔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