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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 VOL. 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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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03

STORY03

자동차 여행
시간의 협곡 속으로 떠나는 여행

풍경의 내면 들여다보는 여행의 즐거움

시간의 협곡은 넓고도 깊다. 그 속엔 천둥과 번개 그리고 바다와 땅의 영혼들이 소용돌이치고 있다. 미친 바람소리와 운무가 웅성거리는 시간의 협곡 속에도 길의 욕망들이 도사리고 있다. 까딱 발을 헛디디면 길 밖 천길 나락으로 곤두박질친다. 시간의 길은 언제나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뿐이다. 저 바람을 뚫고 어둠 속을 더듬거리며 걸어가야 한다. 찰나의 방심은 금물. 오직 긴장과 경외심만이 필요할 뿐이다. 짧은 보폭과 우울한 단상들이 자꾸 마음을 주저앉힌다. 채석강, 적벽강, 고창갯벌, 염전…… 시간의 표피들이 켜켜이 쌓인 변산반도의 해안으로 길을 잡아 나선다.

시간의 협곡 너머 저 어딘가 바람과 더불어 사는 사람들이 있다. 바람을 마시며, 바람과 싸우며 수수만년 동안 포구를 지켜온 사람들이 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쉬지 않고 되새김질하는 황소처럼, 묵묵히 변산반도를 지켜온 바람에 그을린 얼굴들이 있다. 주름살 같은 바다 물결들이 떠다닌다. 풍경이 아름다운 건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애환이 서려 있기 때문이다. 풍경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것이 여행이 주는 또 다른 즐거움이리라.

01

새만금방조제를 지나는데 갯벌에 솟아 있는 솟대들이 혀를 내밀고 있다. 한때는 바람을 이끌어주던 수호신들. 그러나 지금은 쓸모없는 나무막대기에 불과할 뿐이다. 바람의 길, 물의 길이 바뀌며 수호신의 위용도 잃고 말았다. 세계 최대의 갯벌 새만금은 지금 개발의 몸살을 앓고 있는 중이다. 썰물 때면 흔히 볼 수 있던 백합조개를 캐던 아낙네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을씨년스럽게 빈 조개껍질들만 나뒹굴고 있다. 몇만 년 시간의 표피와 주름들을 메우고 미래를 여는 희망의 대역사. 그러나 지금 당장은 고통일 뿐이다. 그 고통이 더 크게 보인다. 물고기는 물을 떠나 살 수 없다. 갯벌이 아프니 갯벌을 지나는 내 눈과 마음도 아프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채석강으로 향한다.

부안의 채석강은 중국 당나라 시인 이태백이 배를 타고 술을 마시다가 강물에 뜬 달을 잡으려다 빠졌다는 채석강과 흡사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변산반도 격포항에서 닭이봉 일대를 포함한 1.5㎞의 해안 기암절벽을 말한다. 흔히 강으로 오해되기 쉬우나 실은 강이 아니고 바닷가 층암절벽이다. 이곳의 지형은 선캄브리아대 화강암, 편마암을 기저층으로 하고 중생대의 백악기(약 7천만 년 전)에 퇴적한 퇴적암의 성층이다. 바다물의 침식에 의해 마치 수만 권의 책을 쌓아 올린 듯 와층을 이루고 있다.

오늘도 어김없이 채석강에 바람이 분다. 책장이 찢겨져나가는 소리에 귀를 연다. 공룡들의 울음소리, 짓밟히는 꽃들의 아우성, 전장의 창칼 부딪는 소리, 말발굽 소리…… 바람이 만들어내는 수많은 소리들로 정신이 혼미해진다. 물과 바람이 빚어놓은 대자연의 절경 앞에서 어찌 감히 고개를 들고 서 있으랴. 감탄, 감탄만이 절로 흘러나온다. 문득 “절경은 시가 되지 않는다.”는 어느 시인의 말이 떠오른다. 송나라의 시인 소동파가 놀았던 적벽강과 비슷하다 하여 붙여진 적벽강은 백사장 북쪽 1㎞ 지점에 있다. 1930년대에 개장한 인근 변산해수욕장은 모래가 부드럽고 수심이 완만하여 가족단위 피서지로 적합하다. 2㎞에 걸쳐 이어지는 해송이 인상적인 고사포해수욕장은 물때를 잘 만나면 해수욕장 앞 하섬까지 걸어서 들어갈 수 있는 신비의 바닷길을 체험할 수 있다. 격포에서 맛본 자연산 활어들과 수산물, 그리고 곰소항의 다양한 젓갈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이다.

내변산 내소사 입구 전나무 숲길은 시간이 잠시 숨을 고르기에 좋은 곳이다. 그래서인지 유독 홀로 산사를 찾는 사람들의 모습이 자주 눈에 보인다. 혼자라는 건 생각할 게 많아서 좋다. 버릴 게 많아서 좋다. 멀리서 내변산 계곡 직소폭포의 물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득음의 절창을 듣기 위해 하강한 선녀들의 재잘거림이 귀를 즐겁게 한다. 신선대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해발 150여m에 위치한 산곡의 분지마을 대소를 거쳐 직소폭포, 분옥담, 선녀탕 등 절경들을 연출하고 서해로 빠지는 이른바 봉래구곡이라고 부르는 천혜의 비곡이다. 저 계곡 어딘가에 오래전 불타버린 대소래사가 있을 것이다. 유실된 역사의 생생한 숨소리가 꿈틀거리고 있을 것이다. 시간의 협곡은 흘러가되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묻힌다는 건 발굴을 전제로 한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발견을 해내는 눈이다.

02

갯벌의 일몰……. 염전에 걸린 노회한 태양빛이 짜다. 소금알갱이들이 몸을 뒤척인다. 아직 멀었다, 갈 길이 멀다. 아무리 쥐어짜봐야 짠물뿐인 生들. 버려지고 잊혀져가는 生들. 하지만 저 작은 알갱이들의 표피엔 억만년 시간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묻어 있다. 소금, 그 순백의 결정체가 젓갈을 발효시키고 김치를 발효시키고 나를 발효시킨다. 추억을 발효시키고 시간을 발효시킨다. 그 옛날 영화를 회상하듯 노을에 비친 염전은 온통 황금빛이다. 그래, 고창갯벌은 아직 살아있다. 그곳엔 아직 바람의 길, 물의 길, 생명의 길이 넘실거리고 있다. 갯벌의 말랑말랑한 힘은 후손에게 전하는 거룩한 말씀이다. 도저한 말씀이다.

세상 모든 욕망의 길은 멀다. 또한 길은 짜다. 그러나 짠물임에도 반드시 가야 할 길이 있다. 갯벌 속에도 강이 흐르고 협곡이 흐르듯 절망이 희망을 살린다. 나는 그것을 믿는다. 지난 수억 년을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영원히 시간의 협곡은 말이 없을 것이다. 그 안에서 누군가는 울고, 누군가는 웃고, 누군가는 사랑할 것이다. 다만 드러내지 않을 뿐. 기억하라, 바람은 언제나 그대 등 뒤에 있다.

고영
시인, 시집 『딸꾹질의 사이학』 『너라는 벼락을 맞았다』 등. 현재 시전문지 《시인동네》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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