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쌍이 흘레붙은 잠자리들
아파트 마당에 세워둔 내 차
담청색 물빛에 속아
보닛에 유리창에
좁쌀 목걸이 같은 알들 슬어놓았다
몸 풀 물가를 찾아
기억 아득한 물 냄새를 좇아
한 몸으로 엮인 잠자리 부부는
종일 하염없이 날아 헤맸을 것이다
펄펄 끓는 솥뚜껑 같은 철판 위에서
에그 프라이가 된 알들을
그냥 붙이고 나는 하루를 달렸는데
연못이 된 차를 몰고
달구어진 도시를 헤매었는데
휘황찬란한 불빛에 속아
내 알들 슬어놓은 이 세상 바닥은 또
연옥(煉獄)이 아니겠는지
―졸시 「잠자리가 보닛 위에 알을 슬어놓았다」 부분
전에 내가 살던 아파트는 중계동 당현천변에 있었다. 여름날이면 지상 주차장에 세워놓은 차의 보닛과 앞유리에 잠자리들이 좁쌀 목걸이 같은 알들을 슬어놓은 것을 발견하고는 했다. 혼인비행을 하던 잠자리 쌍이 미처 물가까지 가지 못하고, 차의 물빛에 속아 그만 알들을 슬어놓았던 것이리라. 차마 안쓰러워 그 알들을 금세 닦아버리지 못하고 하루를 보내고 나서 나는 시를 한 편 끄적거렸다.
2000년, 새 밀레니엄이 밝아오자마자 나는 막 새로 출시된 매그너스를 구입했다. 남과 다른 것을 좋아하는 나는 카탈로그 안의 색상표만 보고 단번에 하늘색과 회색이 섞인 듯한 물빛을 선택했다. 남들은 처음 보는 디자인과 당시 흔치 않은 색상에 무슨 외제차냐고 묻고는 했고, 다른 차로 바꾸기까지 아주 오랜 기간 동안 크게 바뀌지 않은 외형 덕분에 언제나 새 차 같은 기분으로 싫증냄 없이 차를 탔었다.
대우 매그너스
물빛 매그너스는 나 혼자 타는 내 차로 처음 구입한 것이었다. 혼자 몇 년을 해오던 치과 일을 그만두고 파트타임으로 일하기로 하고 주부로 돌아온 직후였다. 바깥일 하랴, 박사과정을 하며 공부 계속하랴, 초등학교에 들어간 딸아이와 어린 아들까지 돌보랴,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것 없이 몸도 안 따르고 너무나 버거웠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이 가장 나를 필요로 하는 몇 년간만 쉬며 애들 곁에 있어 주다가 다시 본격적으로 일을 해보겠다던 생각이었지만, 나는 결국 지금까지 그러지 못하고 말았다. 하지만 아이들을 내 차에 싣고 아이들의 손발이 되어 함께 부지런히 뛰어다니던 그 시절은 경제적인 손실을 보상하고도 남을 만큼 내 인생에서 가장 가치 있는 시간이었고, 내 젊은 날의 가장 소중한 날들이었다.
온전히 나의 것이 된 차를 몰고 꽤나 많은 곳들을 쏘다니기도 했다. 또, 다른 엄마들처럼 아이들을 차에 태우고 여기저기로 라이드 하는 일이 내 일과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야외로 놀이공원으로 돌아다니기도 했지만, 학원이나 교육원으로, 수영장 스케이트장 등등…… 공부하러 들어가거나, 운동을 하거나 레슨을 받는 두 아이를 차 안에서 기다려야 하는 일이 꽤나 많아졌다. “내 삶은 기다림의 연속이다”라고 우스개로 이야기하곤 했었는데, 잠깐씩 조는 것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많은 시간을 차 안에서 보내야 했던 것이다. 그간 읽고 싶었던 책이나 시집을 읽고, 떠오르는 시상을 메모하기도 하며 그 시간들의 많은 부분을 보냈다. 그리고 결국, 내 첫 차와 이별을 한 그해, 그 쌓였던 시간을 보상받듯, 나는 시인으로 등단을 할 수 있었다.
학원 끝낸 아이에게서 걸려오는 벨소리에
산골 외딴집 무너져 버리고
차창 가득 쌓인 눈 와이퍼로 밀어내며
잠시의 즐거운 고립을 끝내는데
당신 기억 속에 쌓여
질척이거나 얼어붙지 말아야 할
내 그리움의 잔설을 걱정하며
소복자락처럼 환한 길 더듬어 돌아오는 것인데
―졸시 「첫눈 오는 밤의 패러디」 부분
함께하는 긴 세월 동안 한 번도 잔 고장이나 사고로 나를 괴롭힌 적 없는 나의 차! 나와 아이들의 애마요 침실이었고 또 때로는 카페며 식당이기도 했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내가 의지할 수 있는 든든하고 편안한 친구고 애인 같은 존재였다. 또한 내 마음대로 밟고 달리고 컨트롤할 수 있는 나의 충실한 종이기도 했다. 이 멋진 나의 차를 남모르는 애인으로 삼아 꽤나 야한 시를 써보기도 하였다.
대우 매그너스
하루에 지친 당신, 어서 오십시오
달빛도 환한 멋진 밤입니다
먼저 불안한 마음부터 단단히 붙들어 매시구요
그대 희고 가는 손가락으로 내 중심에 가볍게 접속하면 시작입니다
은은하게 조명을 켜신 후
내 탄탄한 가슴에 양손을 부드럽게 얹고
두 다리를 편안하게 벌려 주십시오
주도권은 그대에게 있으니
좋아하는 체위로 맘껏 즐기시면 됩니다
나 비록 6기통 근육질의 힘세고 날렵한 스포츠형은 아니지만
발끝에서 온몸으로 전해오는 떨림에 집중하며 다루어 보세요
내 타코미터에 당신의 심박수를
서라운드 선율의 비트에 호흡을 맞춰보세요
우리, 몸은 점점 뜨거워지고
심장의 고동은 거칠고 빨라질 겁니다
이 길은 당신 욕망에 브레이크를 밟을 필요가 없는 자유로입니다
그저 그대의 감각으로 연애의 완급을 조절하고
당신 뜻대로 원하는 절정을 리드하면 그뿐 …(중략)… 원하신다면 담배 한 대나 커피 한 캔의 여운도
제 앞에선 눈치 보지 말고 느긋하게 즐기십시오
오랜만에 즐거웠습니다
저는 당신이 버리기 전에는 절대 먼저 등 돌리지 않는
그대만의 듬직하고 충직한 종이랍니다
언제라도 저를 달려주십시오, 기다리겠습니다
―졸시 「드라이버스 하이」 부분
자동차가 우리네 일상에서 뗄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많은 글과 시의 흔한 소재가 되었다. 무생물이지만, 오랜 시간 함께하다 보면, 그 옛날의 애마처럼 호흡과 영혼을 나누는 생물적 존재가 되는 것이리라. 나의 차도 그러했고 지금도 그러하다. 지금은 또 다른 애마와 호흡을 맞추고 있지만, 맨 처음 나만의 애마였던 첫사랑 매그너스, 내 시의 싹이 탄생했던 그 아늑한 품을 잊을 수 없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