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색 프라이드 3도어! 1996년 6월 어느 날 50만원에 나와 인연을 맺은 다섯 살 된 중고차, 생애 처음으로 가져본 내 인생의 차이다. 필자는 당시 자동차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자동차회사에 다니면서도 운전에는 관심이 없었고 대중교통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살았다. 아니 어쩌면 자가용을 구입할 엄두를 못내던 형편이었기에 아예 운전면허조차 따지 않고 그 핑계로 자동차도 외면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자동차회사에 다니는 사람이 운전도 못한다고 주위에서 핀잔을 주어도, 결혼해서 아내를 태우고 멋진 드라이브라도 하고 싶다는 마음이 가끔 생길 때도 자동차는 내 인생과는 먼 물건처럼 취급했다.
그런데 아이가 태어난 그해(1995년) 겨울, 눈이 펑펑 온 어느 날 나는 자동차를 처음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날 아내는 감기에 걸린 아들을 안고 병원에 가야 했다. 우리가 살던 곳은 큰길가가 아닌 골목길이라 마을버스만 다니는 곳이었다. 그날따라 눈이 엄청나게 온 뒤였고 아내는 오지 않는 마을버스를 기다리느라 한 시간 동안이나 동동거려야만 했다. 택시들도 오지 않고 걸어 갈 수도 없고 아내의 안타까움에 내 인생 최고의 결심을 하게 된 것이다. “자동차를 사야겠다!”
기아 프라이드 신문 광고
그리고, 날이 따스해지기를 기다려 운전면허학원에 등록하고 필기시험을 보았고 어렵지 않게 운전면허를 땄다. 새 차를 살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니 중고차를 구해야 했다. 회사의 강선배라는 분이 자신의 형이 방송국 기자인데 새 차를 사게 되어 타던 차를 판다고 말해 주었고 그 차가 바로 나와 인연을 맺게 된 프라이드이다. 5년이나 된 차였지만 운행거리도 짧고 깨끗하였다. 비록 수동기어이고 작은차지만 필자를 흥분시키기에 충분할 정도였으므로 두말하지 않고 구입을 하였다.
평생 꿈도 못꾸던 자가용이 생긴 것이다. 사람에게 애장품은 변하게 된다. 첫 장난감 권총, 탁구채, 야구방망이, 테니스라켓, 배낭과 침낭 그리고, 컴퓨터(당시는 컴퓨터도 월급에 육박하는 고가품이었다) 등, 차가 생기고 나서 나의 애장품은 프라이드가 되었다. 그 이후 내 애장품인 흰색 프라이드는 나와 많은 사연을 만들게 되었다. 첫 사연은 바로 구입한 첫날부터 발생했다. 운전면허를 따긴 했지만 도로연수를 해 본 적이 없어 차를 가지고 와야 하는데 몰고 올 수가 없었다. 며칠 후 손위 처남에게 부탁해 차를 판 사람이 살던 잠실에서 처남집까지 차를 끌고 가게 하였다. 이어 주말에 처남을 대동하여 자유로에서 한번 왕복하면서 운전연습을 하였고(도로연수를 한번 해 본 것이다) 그렇게 프라이드는 내가 살던 집 주차장에 며칠 만에 오게 되었다.
문제는 그 이후부터였다. 막상 월요일이 되어 가니 회사로 차를 끌고 갈 걱정이 앞서 잠도 오지 않았다. 어쩌랴 기왕 벌어진 일인 것을, 하는 수 없이 차량이 많지 않은 꼭두새벽에 차를 끌고 가서 늦은 밤 시간에 차를 끌고 오기로 작심하였다. 이윽고 월요일 새벽이 오자 5시 30분경에 경광등을 비롯한 차량의 모든 불을 켜고 “초보운전” 딱지를 붙인 다음 1단으로 시동을 걸었다. 그런 다음 한 번도 변속을 하지 않고 1단 만으로 회사까지 운전했다. 1단으로 출근한 사람이 있을까. 식은땀이 났다. 하지만, 회사까지 온다고 문제가 해결 될 리 없었다. 회사에 도착해 차를 정문 앞에 세운 채 딱한 얼굴을 하고 운전할 수 있는 선배들을 기다릴 수 밖에…
그리고, 날이 따스해지기를 기다려 운전면허학원에 등록하고 필기시험을 보았고 어렵지 않게 운전면허를 땄다. 새 차를 살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니 중고차를 구해야 했다. 회사의 강선배라는 분이 자신의 형이 방송국 기자인데 새 차를 사게 되어 타던 차를 판다고 말해 주었고 그 차가 바로 나와 인연을 맺게 된 프라이드이다. 5년이나 된 차였지만 운행거리도 짧고 깨끗하였다. 비록 수동기어이고 작은차지만 필자를 흥분시키기에 충분할 정도였으므로 두말하지 않고 구입을 하였다.
평생 꿈도 못꾸던 자가용이 생긴 것이다. 사람에게 애장품은 변하게 된다. 첫 장난감 권총, 탁구채, 야구방망이, 테니스라켓, 배낭과 침낭 그리고, 컴퓨터(당시는 컴퓨터도 월급에 육박하는 고가품이었다) 등, 차가 생기고 나서 나의 애장품은 프라이드가 되었다. 그 이후 내 애장품인 흰색 프라이드는 나와 많은 사연을 만들게 되었다. 첫 사연은 바로 구입한 첫날부터 발생했다.
운전면허를 따긴 했지만 도로연수를 해 본 적이 없어 차를 가지고 와야 하는데 몰고 올 수가 없었다. 며칠 후 손위 처남에게 부탁해 차를 판 사람이 살던 잠실에서 처남집까지 차를 끌고 가게 하였다. 이어 주말에 처남을 대동하여 자유로에서 한번 왕복하면서 운전연습을 하였고(도로연수를 한번 해 본 것이다) 그렇게 프라이드는 내가 살던 집 주차장에 며칠 만에 오게 되었다.
문제는 그 이후부터였다. 막상 월요일이 되어 가니 회사로 차를 끌고 갈 걱정이 앞서 잠도 오지 않았다. 어쩌랴 기왕 벌어진 일인 것을, 하는 수 없이 차량이 많지 않은 꼭두새벽에 차를 끌고 가서 늦은 밤 시간에 차를 끌고 오기로 작심하였다. 이윽고 월요일 새벽이 오자 5시 30분경에 경광등을 비롯한 차량의 모든 불을 켜고 “초보운전” 딱지를 붙인 다음 1단으로 시동을 걸었다. 그런 다음 한 번도 변속을 하지 않고 1단 만으로 회사까지 운전했다. 1단으로 출근한 사람이 있을까. 식은땀이 났다. 하지만, 회사까지 온다고 문제가 해결 될 리 없었다. 회사에 도착해 차를 정문 앞에 세운 채 딱한 얼굴을 하고 운전할 수 있는 선배들을 기다릴 수 밖에…
가난했지만 행복했던 시절을 함께 보낸 프라이드(사진. 구글 이미지)
이윽고 출근하는 선배에게 부탁하여 회사 지하주차장에 주차를 했다. 하루가 어떻게 갔는지 모르지만 집에 갈 걱정만 하고 있었다. 퇴근후 선배가 다시 지하주차장에서 차를 꺼내주었다. 이제는 다시 내 힘으로 저 괴물을 끌고서 귀가를 해야 한다. 필자는 밤 10시쯤 다시 경광등을 켠 채 1단으로 변속 없이 목동의 산자락에 있는 빌라에 겨우 도착했다. 그리고 걱정하던 아내를 불러 30분에 걸쳐 왔다 갔다 하면서 주차를 했다. 하루가 갔으니 저 엄청난 괴물과 첫날을 무사히 마쳤다. 태어나서 이만큼 수명을 감수한 날은 없었으리라.
이후 하나씩 기능을 도로에서 익혀 나갔는데 도로에서 시동을 꺼먹기도 하고 지나가는 많은 운전자들에게 욕도 먹었다. 한 달쯤 지나 차량을 모는 것이 조금씩 익숙하게 되어 갈 즈음 여름휴가철이 되었고 또다시 무모한 계획을 세웠다. 이번 여름에는 차를 몰고 고향에 가자. 고속도로는 차를 몰기가 편하다고 하더라. 도전해 보자. 그래, 부딪쳐 보면 어찌 되겠지. 차를 몰아본지 1달 밖에 안 되는 왕초보가 서울에서 울산까지 운행을 하는 도발을 감행한 것이다.
지금도 그때를 잊지 못한다. 이런 것을 두고 죽다가 살아난 것이라고 하는구나. 다시는 이렇게 살지 말아야지. 별 생각이 다 들었다. 끼어들기도 제대로 못하고 도로를 주행하던 다른 차량들에게 위험을 안기기도 하였지만 어쨌든 모험은 성공을 했다. 휴가 내내 차를 끌고 서울로 가는 걱정에 고향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다시 용기를 내어 무사히 서울로 올 수가 있었다. 울산까지 한번 갔다 왔더니 간이 커 졌는지 기술이 나아졌는지 그럭저럭 차와 호흡을 같이 하기 시작했다.
차를 애지중지하면서 어린 아들과 새댁인 아내를 데리고 산으로 들로 여행을 많이도 다녔다. 지금도 차를 조심조심 양보운전하고 가급적 다른 차량들을 상대로 방어운전을 하는데 아마 그때의 기억이 평생운전을 지배해서 그런 것 같다. 비록 50만원짜리 5년 된 중고차였지만 내가 몰아본 첫 차였기 때문에 내게는 프라이드가 최고로 느껴졌다. 당시 아내에게 늘 “차는 작지만 에어컨은 이 차가 최고다”라고 자랑하며 다녔다. 차가 작다고 행복까지 작을 수는 없지 않는가. 다 생각하기 나름일 것이다. 나를 믿고 그 위험한 가운데도 천연덕스럽게 내 작은차를 타 준 아내에게 고맙다. 무엇보다도 무던히 나의 도전과 고심을 이해해주어 고맙다.
1990 프라이드 3도어
자동차를 몰기 시작한 지 1년쯤, 이제 프라이드 운전대를 잡는 것이 편안하게 된 즈음 필자는 1997년 9월경 회사에 사표를 냈다. IMF 사태가 온 나라를 흔들었고 필자의 가정에도 태풍을 몰고 왔다. 필자는 인생의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했다. 억지로 억누르고 있었던 꿈, 먹고 살기 위하여 접었던 꿈을 위하여 도전을 시작했다. 모아둔 돈도 한 푼 없이(살던 전셋집도 아내의 회사가 빌려주는 돈으로 얻은 것이었다) 재산이라고는 달랑 50만원짜리 프라이드가 다였던 필자가 생계를 아내에게 오롯이 맡기고 프라이드를 타고 신림동을 오가며 사법시험에 도전하였다. 34살 때의 일이다.
그리고, 지금은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사법연수원에 입소할 무렵(38살 때의 일이다) 그렇게도 아끼던 흰색 애마가 탈이 나 결국 폐차를 했다. 물건에 무슨 감정이 있으랴. 그래도 눈에 삼삼하다. 작은 흰색차와 함께한 비탈길, 험로, 궂은 비, 내리막, 눈총들이 눈에 선하다. 하지만 필자의 도전은 계속된다. 몽골인들은 말 위에서, 바이킹족들은 배 위에서 추억을 쌓는다고 한다. 흰색 프라이드와 함께 했던 추억이 사뭇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