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 옹야 편에 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제자인 자유가 무성이라는 고을의 수령이 되어 얼마 뒤에 공자를 뵈었다. 공자의 첫 질문은 “너는 사람을 얻었느냐?”였다. 자유가 답한다. “네. 얻었습니다. 담대명멸이란 사람인데, 골목 지름길로 가지 않고 공적인 일이 아니면 제 방에 오지 않습니다.”
공자의 위대성은 의외성에 있다. 자공이 “지나친 것이 모자란 것보다는 낫지요?”하고 묻자 “지나친 것은 모자란 것과 마찬가지다”라고 답하고 자로가 “죽은 뒤의 일을 알 수 있나요?”하고 묻자 “삶도 다 모르는데 죽은 뒤는 알아서 뭐하게?”한다. 공자는 범인의 허를 찌르는 화두를 던진다. 지방자치단체장이 된 제자에게 “큰 토목 사업을 맡았느냐?” “백성들이 잘 따르느냐?” “돈 좀 챙겼냐?” 같은 질문이 아니라, “사람을 얻었느냐?(득인得人)”는 질문을 던지다니. 평범한 사람들이 생각했던 정치와 전혀 다른 차원의 정치 개념을 갖고 있었기에 가능한 질문이었다. 정치의 핵심은 결국 득인에 있다는 것을 공자는 간파했다. 그의 질문은 엉뚱했지만 본질적이었다.
엉뚱함은 인문학적이다. 자연은 엉뚱하지 않다. 인간의 눈에 아무리 이상하게 보이는 동식물이라 해도 그들에게는 그들 나름의 질서가 원칙이 있다. 태양은 수십억 년 동안 정확한 궤도를 유지하고 있으며 달은 늘 일정한 주기로 모양을 바꾼다. 봄에 필 꽃은 가을까지 개화를 연기하지 않으며 매미는 겨울에 울지 않는다. 다만 인간만이 엉뚱한데, 이게 인간을 위한 엉뚱함일 때 ‘인문’이라는 말을 붙일 수 있다. 인문학의 라틴어는 후마니타스로 이 반대말인 인후마니타스(Inhumanitas)는 ‘몰인정, 잔인함, 냉혹, 야만성, 무례, 상스러움, 불친절, 인색함’이라는 뜻이다.
페이턴트 모터바겐
자동차의 발전은 대체로 인후마니타스를 극복하는 역사였다. 1886년 인류 최초로 자동차를 발명한 벤츠는 첫 차의 모습이나 성능에 대해 사람들이 인정해 주지 않아 차를 창고에 처박아 두었다. 이 자동차를 끌어내 처음으로 시운전을 한 사람은 그의 부인 베르타 링거였다. 밤새 96km를 달려 친정까지 시운전을 한 그녀는 브레이크와 핸들의 단점을 벤츠에게 알려줬다. 부인이 아니었다면 벤츠는 첫 자동차를 개선하지 못했을 것이다. 최초의 타이어를 발명한 스코틀랜드의 수의사 던롭은 1888년, 자전거 대회에서 우승하고 싶어 하는 열한 살 아들을 위해 딱딱한 나무 바퀴대신 물을 채운 고무 타이어를 만들어 준다.
이 자전거를 타고 아들은 1등을 했고 던롭은 수의사를 그만두고 타이어 회사를 차렸다. 1918년 미국인 웨스트코트는 자동차가 정면으로 부딪히면서 사고를 당해 크게 부상을 입었다. 어떻게 하면 이런 사고를 막을 수 있을까 고민하던 그는 충격을 흡수하는 범퍼를 발명하게 됐다. 1950년대 영국의 자동차 회사 미니는 아래로 내려가는 자동차 유리창이 아니라 뒤쪽만 5cm 정도 밀어서 열 수 있는 유리를 장착했다. 차 유리를 내렸을 때 여성들의 긴 머리가 흩날려 엉망이 되는 것을 막을 수 없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베르타 링거
테크놀로지의 발전은 늘 인간 중심 사고가 전제 된다. 변화하는 세계에 참신한 아이디어로 대응하지 못한다면 몰락은 정해진 수순이다. 모순이지만, 인간 중심이 되기 위해 우리는 점점 인간이 가진 고유의 기능을 잃어간다. 승용차를 많이 탈수록 걷기 근육이 퇴화하고 내비게이션이 등장하면서 길 찾는 능력을 잃어버렸듯이. 가장 인간중심적인 개념은 안전이다. 지구상에서 자동차 사고로 매년 100만 명이 사망하고 1,500만 명이 부상을 당한다. 사고 원인의 90%는 인간의 실수 또는 부주의다. 이 때문에 자동차산업은 더욱 자율주행, 나아가 무인 주행이라는 미래에 매달리고 있다.
이런 말이 있다. “나이키의 적수는 아디다스가 아니라 닌텐도다.” 왜? 아이들이 닌텐도 같은 게임기기에 빠져 밖으로 나와 놀지 않는 바람에, 운동화 구매 자체를 하지 않아서다. 땅을 밟고 놀아야 나이키든 아디다스든 신게 된다. 따라서 운동화를 팔려면 이 운동화가 얼마나 품질이 우수한지 알리기보다는 야외에서 하는 스포츠가 컴퓨터 게임보다 얼마나 재미있는지를 알려야 한다. “나이키의 적수가 닌텐도”란 명제 역시 의외지만 핵심에 닿아 있다.
그렇다면, 자동차의 라이벌은 무엇일까? 현대차의 적수는 토요타가 아니라 인스타그램일지도 모른다. 멋진 자동차가 과시의 수단이던 시대는 지났다. 현대의 젊은이들은 부가티를 몰고 나온 친구에게는 “돈 많은가 보다”라고 말하지만 인스타그램에 흥미로운 사진을 올리면 “와! 멋진데!”라고 찬탄하면서 자신도 그런 사진을 올리기를 바란다. (나와 매우 가까운 어떤 청소년을 보면 알 수 있다. 우연히도 나와 성이 같은.)
세계인들은 단 1분 동안 200만 번 구글 검색을 하고 300만 개의 ‘좋아요’를 누르며 4만개의 인스타그램 사진을 업데이트한다. 이걸 하느라고 자동차 운전을 점점 덜 하게 된다. 그렇다면 자동차는 더 이상 빠르고 쾌적하고 고성능인 것을 앞세워선 안된다. 가까운 미래에, 휘발유 사용자는 오늘날 담배 피는 사람만큼 혐오를 받게 될 것이고 비싸고 늘씬한 차를 가졌다고 자랑하는 사람은 혈통 좋고 갈기가 멋진 말을 자랑하는 사람 취급을 받을지도 모른다.
자율주행
앞으로 자동차는 단지 이동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재미를 주어야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운전자가 자동차에 직접 어떤 육체적 행위를 가하는 일은 줄어들게 된다. 운전자는 더 자유로워지고 운전하는 시간은 여가나 근무에 할애할 수 있게 된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차를 몰고 간다면, 출발과 정지, 휴게소 정차 등 극히 일부의 순간을 제외하고 서너 시간은 운전자가 온전히 다른 일을 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자동차는 다양한 엔터테인먼트를 제공하거나 쾌적한 근무 환경을 조성해 주어야 한다. 자동차 차체 바깥의 신호를 통해 다른 차와 소통하고 실내에서는 차 주인의 체온과 맥박을 측정해 건강 상태에 대한 조언까지 해주는 기능이 필수가 될지도 모른다. 인문학은 인간에 대한 지식이므로 기술과 더불어 인간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가 이루어질 때 자동차의 미래 역시 정확히 예측할 수 있으리라.